제5장

조서연의 온몸의 피가 굳어버리는 듯했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한기가 순식간에 사지백해로 퍼져나가 그녀를 꽁꽁 얼려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이 너무 순진했다.

노력하면 될 줄 알았다. 경 아주머니의 말처럼,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가 마음을 다잡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자신들의 아이는 윤설아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이는, 아빠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조서연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네가 설아를 안 좋아하는 건 알지만, 걔 몸이 정말 안 좋아. 네가 좀 이해해 줘.” 이도현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달래듯 말했다. “정 아이를 갖고 싶으면, 설아 몸이 좀 나아진 다음에 다시 계획해도 늦지 않아.”

조서연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만약 지금 이도현에게 임신했다고 말하면, 그는 당장 자신을 병원으로 끌고 가 아이를 지우게 할 것이 분명했다.

이 아이는 그녀에게 몇 남지 않은 가족 중 하나였다. 절대로 윤설아 때문에 아이를 잃을 수는 없었다!

“알았어요.” 조서연은 얼굴의 눈물을 닦아냈다. “먼저 바쁜 일 보세요. 방해 안 할게요.”

조서연은 허둥지둥 도망쳐 나와 운율가로 돌아왔다. 자신의 짐을 챙기고 경 아주머니에게 몇 마디 당부한 뒤,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일단 호텔이라도 잡으려고 했지만, 택시 안에서 외삼촌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곧장 그쪽으로 향했다.

문을 연 것은 외숙모 임지영이었다. 그녀는 조서연을 보자마자 살갑게 맞으며 안으로 들였다. “서연아, 드디어 왔구나. 외숙모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그러다 캐리어 말고는 텅 빈 조서연의 손을 보고는 얼굴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조서연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외숙모, 죄송해요. 너무 급하게 오느라 선물을 못 샀어요.”

“서연아, 어서 들어와.” 외삼촌 조지원이 다가왔다. “네가 언제 우리한테 뭐 안 사 들고 온 적 있었니. 그렇게 격식 차릴 필요 없어. 출소한 건 왜 연락도 안 했어. 내가 마중 나갔을 텐데.”

“비도 오고 해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외삼촌, 요즘 잘 지내세요?”

“늘 똑같지 뭐.” 조지원은 현관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물었다. “웬 캐리어야?”

“저 이혼하려고요. 운율가에서 나왔어요.”

“뭐? 이혼?” 임지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이도현이 하자고 한 거야?”

조서연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하고 싶어서요.”

“너 미쳤니!” 임지영이 발을 동동 굴렀다. “이씨 집안이 F국 최고 재벌인데, 얼마나 많은 애들이 시집 못 가서 안달인데 그걸 네가 먼저 이혼을 해? 감방 갔다 오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당신 입 좀 다물어!” 조지원이 아내를 쏘아붙이고는 의분에 차서 말했다. “당초에 이도현이 동영상 진위 확인도 안 하고 바로 서연이를 감옥에 보냈잖아. 누구라도 정떨어질 일이지. 이혼해, 잘했어! 외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외삼촌이 네 버팀목이 되어 줄게. 이리로 들어와서 살아. 외삼촌이 돌봐주기도 좋고.”

조서연이 황급히 거절했다. “아니에요. 저 혼자 집 구해서 직장도 알아볼게요. 외삼촌, 저 걱정 마세요.”

“집에 방도 있는데 뭐 하러 돈 들여서 집을 구해.” 조지원은 말하며 캐리어를 들러 갔다. “이건 그냥 그렇게 정한 거다.”

“그래, 외삼촌 말 들어.” 임지영이 한마디 거들더니 바로 물었다. “서연아, 이혼하는 건 좋은데, 그래서 이씨 집안 재산은 얼마나 받기로 했어?”

“빈손으로 나올 거예요.”

“뭐라고!” 임지영이 발칵 뒤집혔다. “너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어떻게 빈손으로 나와! 돈도 없이 나가서 뭘 먹고 살려고!”

“외숙모, 저 혼전 계약서 썼어요. 원래부터 이씨 집안 재산은 못 받게 되어 있었어요.” 조서연이 화제를 돌렸다. “참, 외삼촌. 외할머니께서 임종 전에 옥패를 하나 주시면서 제 출생에 대해 뭐라고 하셨는데, 그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조지원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지만, 그는 금세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외할머니가 주신 거니 잘 간직하렴. 출생에 대해 말씀하신 건… 그냥 네 신세가 가여워서 넋두리하신 거겠지.”

조서연은 의심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안 계셨지만,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께서 사랑을 전부 주셨어요. 제 신세가 가엾다고 생각 안 해요.”

“네가 그렇게 생각해주니, 두 분도 하늘에서 편히 눈 감으실 수 있겠구나….”

……

밤 10시, 이도현이 운율가로 돌아왔지만 안방에는 조서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조서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이도현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경 아주머니를 불렀다. “사모님은?”

“사모님, 댁을 나가셨습니다.”

“뭐라고?” 이도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 나갔는데?”

“오전에요.”

경 아주머니는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조서연이 떠나기 전, 임신 사실을 이도현에게 절대로 말하면 안 된다고, 그랬다간 아이를 죽이는 꼴이 될 거라고 신신당부했기에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경 아주머니가 서류 한 부를 내밀었다. “이건 사모님께서 남기신 이혼 합의서입니다.”

이도현은 그것을 받아 훑어보더니 냉소를 터뜨렸다. “빈손으로 나가겠다고? 아주 잘나셨네!”

“도련님, 사모님께선 이혼할 마음을 굳히신 것 같습니다.”

“그건 그 여자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이도현이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어디로 갔어?”

“말씀 안 하셨습니다.”

이도현은 그대로 밖으로 걸어 나가 기사에게 차를 몰라고 지시했다.

……

객실에서 조서연이 샤워를 마치고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에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조서연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내려와.”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서연은 핸드폰을 쥔 손을 굳혔다. “저 벌써 잠자리에 들었어요.”

“10분 줄 테니 내려와. 안 그러면 이 아파트 주민들, 오늘 밤 다 잠 못 잘 줄 알아.”

끊어진 전화를 보며 조서연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동 현관문 앞에는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세워져 있었고, 길고 훤칠한 몸의 남자가 차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조서연은 그에게 다가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늦게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냐니! 조서연, 어젯밤에 내가 한 말 귓등으로 들었지? 감히 이혼 서류를 들이밀어? 집까지 나가?” 이도현이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지금 당장 차 타고 집에 돌아가. 그럼 이번 일은 문제 삼지 않을게.”

“집을 나가다니….” 조서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정말 거기가 제 집이라고 생각해요? 그랬다면, 제 남편이 어떻게 밤새 다른 여자 곁을 지킬 수 있죠?”

“결국 또 설아 일이군. 조서연, 속 좀 그만 좁히면 안 돼?”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속이 안 좁은 건데요? 당신들 둘이 애정행각 하는 걸 웃으면서 봐줘야 해요? 계속 걔한테 수혈해 주고, 아니면 또 몇 년 감옥이라도 갔다 와야 하나요?” 조서연이 그를 바라봤다. “도현 씨, 우리 결혼은 이익 교환이었지만, 저도 사람이에요. 윤설아의 피주머니가 아니라고요.”

이도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이 결혼이 이익 교환인 건 너도 아는군. 당시에 네 외할머니 치료받게 하려고 나랑 결혼해서 액땜 노릇 해줬잖아. 이제 외할머니 돌아가시니 바로 이혼하겠다? 토사구팽도 유분수지, 나한테 이래도 되는 건가, 응?”

조서연이 지친 듯 눈을 감았다. “그럼 그동안 외할머니께서 이씨 병원에서 쓰신 돈, 제가 다 갚을게요. 그러면 토사구팽은 아니겠죠?”

이도현의 가슴속에서 분노가 순식간에 타올랐다. “다시 말해 봐!”

조서연은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얼마인지 계산해 주세요. 우선 차용증 써 드릴게요. 분할 상환할 테니, 이자는 당신이 정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앞의 남자가 갑자기 손에 든 담배를 내던지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조서연이 반응할 틈도 없이, 온몸이 남자의 품 안에 갇혔다.

다음 순간, 한 손에 잡힐 듯한 허리가 단단히 붙들렸다. 조서연은 눈앞이 빙 도는 것을 느끼며 순식간에 차체에 몸이 밀쳐졌다.

“무슨 짓… 읍….”

입을 열려던 말이 막혔다. 남자의 얇은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고, 거친 키스는 숨통을 조이며 그녀의 호흡을 남김없이 빼앗아갔다.

“읍….” 조서연이 힘껏 저항했지만, 두 손은 그에게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한참 후에야 이도현은 못내 아쉬운 듯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의 눈에 서렸던 분노는 이미 숨김없는 욕망으로 변해 있었다. 나직이 가라앉은 목소리에 매혹적인 기운이 서렸다. “여기서 당하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차에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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